경건의 겉치레에 속지 말고 삶의 열매를 본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설교자와 교사들을 그들의 열매로 시험하라고 말씀하신다.
두 가지로 그들을 시험해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설교자의 삶의 열매를 보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교리의 열매를 보는 것이다. 만일 설교자의 삶의 열매가 완벽하게 아름다우면서 잘못된 교리를 가르친다면 사람들은 가장 많이 속게 되어 사탄의 열매들을 주렁주렁 맺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설교자가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는 모습에 사로잡히기에 그가 가르치는 것은 반드시 옳다는 잘못된 논리를 갖게 된다. 우리는 어떤 사람의 삶이 올곧으면 그의 가르침도 옳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가르치는 내용을 살펴보고 조심하라고 하셨다. 또 다른 시험도 마찬가지 인데, 설교자가 너무나 아름다운 진리를 가르치며 엄청난 교리를 가르치는 반면 그의 삶에서 열매가 썩어버리는 경우이다. 이러한 경우에도 사람들은 그의 가르침이 옳은 것이니 그의 삶도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삶의 열매를 보고 조심하라고 한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요8:36) 본성이 자유할 때만 바른 설교자와 교사가 될 것이다...
산상수훈을 묵상하면서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 삶의 모든 면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집중적인 관계를 맺을 것을 강권하시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성령의 표준은 주의 자녀들이 얼마나 하나님을 의지하는가 하는 것이다.
겉치례의 가능성(마7:15~20)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여기서 우리 주님은 가장 위험한 교사들을 서술하고 있다. 그들은 우리에게 참된 진리를 말하는 것 같지만 그 속에는 사탄의 영이 있는 자들이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거짓 선지자들을 조심하라고 하신다. 겉치레를 하는 것은 놀라울 정도로 쉽다. 우리의 눈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벗어나기만 하면 우리에게도 경건의 겉치레가 바로 따라온다. 요한일서 1장 7절은 성도의 삶에 반드시 있어야 하는 조건을 말한다.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이 뜻은 우리의 삶 가운데 가려야만 하거나 숨겨진 부분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외에 다른 것을 의지하는 한, 경건의 겉치레의 가능성은 언제나 있다. 물론 겉치레는 자신의 목적과 성공을 위해 두 가지 이상의 삶을 살아내는 위선과는 차원이 다르기는 하지만 반드시 진지한 마음을 가지고 우리의 마음을 바로잡아야 한다. 우리는 자신의 겉치레를 조심해야 한다. 우리의 실제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아주 쉽다. 말하고 설교하는 것은 쉽다. 잘못된 삶을 지옥으로 보내는 설교도 쉽다. 이것을 너무나 잘 아는 바울은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 고백했다. 말의 표현이 화려할수록 그 진리가 삶 가운데 나타날 확률은 적어진다. 여기에 설교자에게는 청중에게 없는 위험이 있다. 그 위험은 무엇인가 설교한 후에 본인이 그렇게 살지 않음으로써 그 설교 내용이 아무 효력이 없게 되는 것이다.
설교자는 그 표현에 있어서 절제가 필요하다. 화려한 말을 하려는 자세나 멋진 문학적 표현을 사용하고 싶은 욕구들, 세상 문화에서 귀히 여기는 것들을 끌어들이고 싶은 충동들을 삼가야 한다. 이러한 것들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동행하는 데 있어서 절뚝거리게 만드는 것이다. 주님은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 금식은 가장 기본개념인 음식을 삼가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고 휠씬 더 깊은 의미가 있다. 자기 도취에 빠지는 모든 것으로부터 금식을 의미하는 것이다...
행함의 원칙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만일 좋은 열매를 맺으려면 우리는 좋은 뿌리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비행기가 새를 모방하는 것이 가능하듯이 사람이 성령의 열매를 모방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나 중요한 차이점은 생명의 원칙이 없다는 것이다. 비행기는 계속적으로 날아다닐 수 없다. 간헐적으로 날 수 있을 뿐이다. 성령을 모방하는 것도 한계가 있는 것이기에 성령의 열매를 모방하려는 자들은 사람들이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볼수 없도록 하기 위해 자신을 차단할 필요가 생긴다. 그렇게 하면 꽤 비슷한 모습이 될 수 있다. 그럼에도 모방은 성령의 생명의 법칙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삶 가운데서 올바르게 행동하려면 먼저 내면의 원칙이 올바르게 서야 한다. 곧 위로부터 거듭나야 하며 성화되어야 하고 성령으로 충만해야 사람의 열매가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성령의 열매에 대해서는 서신서에서 선명하게 설명해놓았다. 성령의 열매는 성령의 은사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열매를 맺는 다는 것은 언제나 예수그리스도와의 친밀한 연합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요15:1-5)...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마10:16) 주님은 주님의 제자로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 사람은 결국 주님의 원수로 드러날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하나님께서 주의 보좌위에 계신 것이 분명하심같이 각 사람들은 결국 자신들이 실제로 누구인가를 드러낼 수밖에 없는 것이다...하나님의 영적세계에서 공적이면서 외부적으로 열린 부분은 성경이다. 성경은 계시된 사건들의 세계이다. 만일 우리가 성경의 세계에서 살면 우리의 뿌리는 건강하고 삶은 올바르게 된다. “나는 전에 한 번 경험이 있었는데”라고 말하는 것은 아무소용이 없다.
중요한 초점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이다. 모든 것의 근원이신 주님께 마음을 두라. 그렇게 하면 당신으로부터 생수의 강이 흐르게 될 것이다. 우리 중에는 종교적인 삶속에 어떤 의식적이 경험에 사로잡히더니 결국 전혀 소용이 없는 존재가 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말씀에 굳게 서서 주님께만 뿌리를 내리라.
「산상수훈」오스왈드챔버스